이제니 - 흑곰을 위한 문장

사무엘럽 2021. 6. 8. 23:24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이제니 시집, 문학과지성사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사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이제니 시집, 현대문학 아마도 아프리카 (창비시선 321), 창비

 

 

 흑곰에 대해서 쓴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선 아무것도 쓸 수 없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쓰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이를테면 흑곰의 마음 같은 것. 마음을 대신하는 눈길 같은 것. 눈썹 끝에 맺혀 떨어지는 눈물 같은 것. 머나먼 북극권으로 사라지는 한 줄기 빛 같은 것. 한 줄기 빛으로 다시 시작되는 오래전 아침 같은 것. 산더미만 한 덩치에 보드랍고 거친 털옷을 입고 있습니다.

 

 흑곰의 울음소리: 우우우어어어워워워어어오오어

 

 흑곰의 노랫소리: 우우우워워워어어어우우우어어

 

 흑곰의 일생에 대해 생각한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문득 가까워지기 때문에. 알고 싶다고 생각하면 보이지 않던 속살이 보이기 때문에. 모음과 자음으로 꽉 찬 낱말처럼 무언가 가득 차 있는 것. 이를테면 용기와 믿음 같은 것. 후회와 반성 같은 것. 떨림음처럼 배 속 저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울음 같은 것. 바닥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한숨 같은 것. 좀처럼 울리지 않는 종이 있을 것이고. 좀처럼 열리지 않는 창이 있을 것이고.

 

 흑곰의 발자국 소리: 쿠우웅 쿠우웅 쿠으우웅 쿠우웅

 

 흑곰의 춤추는 소리: 쿠우우 쿠우우웅 쿠우웅 쿠으응

 

 흑곰의 겨울잠에 대해서 쓴다. 새끼를 낳는 어미를 본 적도 없이. 헤엄을 치고 나무를 오르는 여름도 없이. 열매나 견과류를 먹는 얼굴 없이도. 누군가의 마음속 검은 점처럼. 지워지지 않는 잔상을 바라보듯이. 세계의 이곳저곳에서 출몰하는. 어쩌면 내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꿈의 꿈속에서야 내게 흑곰이란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흑곰의 흑점. 흑점의 흑연. 흑연의 흐느낌으로. 그리하여 마지막은 기침이다. 기침으로 기척하는 아침이다. 아침으로 다시 시작되는 검은 몸이다. 검은 몸으로 흘러가는 검은 문장이다. 검은 문장으로 다시 열리는 검은 창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