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신해욱 - 화이트아웃
사무엘럽
2020. 11. 18. 11:56
맨발에 실내화를 끌고. 속은 것 같다. 우리는 닥치는대로 희고 동그란 답을 찾아 헤매다가. 케이크에 봉착하고 말았습니다.
귀가 많으니까. 귀로 준비하자. 제물을 바치듯이. 고사를 지내듯이.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고. 앞치마에 손가락을 닦고. 차례로 귀를 떼어내어 케이크의 가장자리를 장식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케이크는 크고. 케이크는 하얗고. 원을 깨면 벌을 받는다. 깨지 않으면 숨이 막힌다. 숨이 막힌 다음에도 귀는 사흘간 열려 있으니까. 이마를 훔치고. 침을 삼키고. 귀에는 귀. 귀에는 귀. 우리는 케이크 앞에 꼼짝없이 묶여 있어야 했습니다.
케이크는 무한하고. 케이크는 냉혹하고. 우리는 마치 종말이라도 막으려는 듯이. 아비규환을 피하려는 듯이. 과묵하게. 적나라하게. 천둥이 친다. 번뇌가 끓는다. 심지어 개가 짖고. 심지어 기침이 나고. 살기등등하게 케이크가 갈라지며 실내는 치찰음으로 가득해졌습니다.
우리는 판독 불능이었습니다. 우리는 마치 접근 금지를 당한 듯이. 바깥으로 내몰린 듯이. 중심을 잃은 듯이. 원격조종을 받는 듯이. 케이크를 퍼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캄캄했습니다. 캄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