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욱 - 천변에서

사무엘럽 2020. 11. 18. 03:05

 

무족영원:신해욱 시집, 문학과지성사 Syzygy:신해욱 시집, 문학과지성사 간결한 배치, 민음사 일인용 책:신해욱 산문집, 봄날의책 해몽전파사 신해욱 소설 양장본 생물성, 문학과지성사

 

 

 이쪽을 매정히 등지고

 검은 머리가 천변에 쪼그려 앉아 있습니다

 

 산발입니다

 

 죽은 생각을 물에 개어

 경단을 빚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동그랗고

 작고

 가차 없는 것들

 

 차갑고

 말랑말랑하고

 당돌한 것들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핏가루 콩가루

 빵가루

 뇌하수체 가루

 알록달록한 고물이 담긴 쟁반을 받쳐 들고 있습니다

 

 - 나눠 먹읍시다!

 

 나눠 먹읍시다 메아리도 울리는데

 

 검은 머리는 뒤를 돌아보지 못합니다

 검은 머리만 어깨 너머로 흘러내립니다

 이크, 몇 오라기가

 경단에 섞였는지도 모릅니다

 

 쟁반을 몰래 내려놓고 

 머리를 땋아주는 일이 먼저일 것 같습니다

 

 검은 머리가 삼손의 백발이 될 때까지

 백발마녀가 라푼젤로 환생할 때까지

 그다음엔

 그다음엔 꼭 나눠 먹읍시다

 

 어제의 네가

 오늘을 차지하고 있어서

 오늘의 나는

 이렇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