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 없는 책

사무엘럽 2021. 5. 22. 07:58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이영주 시집, 문학과지성사 108번째 사내 : 개정판 언니에게:이영주 시집, 민음사 차가운 사탕들, 문학과지성사

 

 

 선생은 꿈 바깥으로 걸어 나와 내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뱀-물, 이 부분을 읽어라.

 

 나는 거리의 도서관으로 휩쓸려 갔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밤의 덩어리가 의자처럼 곳곳에 뭉쳐 있었다. 이 책은 어디에 있나요. 받침이 없는 의자에 앉아서 나는 잠깐 숨을 골랐다. 휩쓸려 가는 것에는 발이 필요 없지. 무정형으로 떠다니는 순간들이 쌓였다. 의자는 무겁기도 하고 가볍기도 한 텅 빈 도형. 자꾸만 밑으로 빠져버렸지. 나는 없는 발을 버리고 길고 어두운 골목길이 끝도 없이 펼쳐진 현실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그곳에는 선생이 없고 플라넷이라는 사서만 엎드려 있었다. 뱀-물, 이라는 제목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듯이. 나는 플라넷의 등에 썩어가는 혹처럼 얹혀 있었다. 그의 등에 염증이 돋아났다. 이 책은 어딘가 깊은 곳에 있나요. 습기가 많아야 염증이 번지지. 플라넷은 누군가의 눈물이 자신의 내부에 흐르도록 내버려두었다. 말이 없었고 흐느낌만 가득한 도서관이었다.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요. 나는 부스럼이 돋는 입을 달싹거렸다. 그는 조금 더 깊게 블록 안으로 들어가 엎드렸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안쪽에서 현실이 조금씩 움직였다. 이 밑에 더 많은 뱀-물이 있다. 그것을 끌어올리면 이 도서관의 끝에 다다르지. 그는 물을 토하며 천천히 기어갔다. 사서가 없는 도서관이라니. 나는 온몸으로 번지는 염증 때문에 벅벅 긁었다. 이렇게 물이 많은 책을 찾으면 만날 수 있을까. 조금 더 특별하게 멀어질 수 있을까. 나는 불이 붙지 않는 의자에 앉아서 다시 숨을 골랐다. 의자가 도형의 형태를 바꾸며 현실로 떠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