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 양조장
집이 너무 오래되면 사람이 된다는데 할머니는 가끔 지하에 내려간다. 그곳에는 비에 젖은 술통이 가득하고 썰다 만 돼지고기가 굴러다닌다. 그래서인가. 풍요롭고 넉넉한 지하 세계가 있다는 전설이 때로는 현실 같지. 할머니는 손가락을 뻗어 술통의 빗물을 쓸어본다. 비를 찍어 맛본다. 이 감각은 무엇일까. 피에 젖은 수건처럼 손을 물들이는 이 맛은. 잘 벼려진 칼날로 남은 돼지고기를 썰다가 할머니는 낄낄거린다. 어둡고 붉다는 것이 한때는 사랑의 감각인 줄 알았지. 썩어가도 맛있었지. 항아리 모양의 치마 안에 숨어 있던 서늘한 살 조각들. 뭉개지며 바닥으로 흘러가도 좋았지. 그때마다 할머니의 지하가 넓어졌지. 계단을 내려가서 계단 밖으로 멈추지 않고 내려가면 울고 있던 돼지들은 크고 굵은 할머니의 다리가 되었지. 한번 들어오면 계속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야. 고통에 푹 익어가는 향기로운 술통들처럼. 할머니는 가혹한 진입의 운명을 알고 있지. 숨을 참는 울음은 잘 익어서 내내 깊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그것을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는 걸. 사람의 안쪽에 집이 생기고 그것을 자꾸만 잊는다는 걸. 그곳은 너무 멀어서 꿈처럼 무너진다는 걸. 사람이 사람에게 건너가는 일은 집을 다 부숴야만 가능하다는 걸. 그렇게 지하에는 가다 만 영혼들이 서로의 입김을 나누며 술을 마시고 있다. 비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핏기가 비릿하게 퍼져나간다. 그것이 사랑인 줄 알았는데. 영혼들이 휘청거리며 서로에게 부딪친다. 새 술통을 따는 할머니는 지도에 없는 시골 마을에서 향기로운 지하의 전설을 파고드는 사람. 무관한 창문에 가느다랗게 들어오는 빛으로 유서를 쓰는 사람. 너무 넓어서 건너갈 수 없는 이 지하에서 어떤 화석이 되겠습니까. 할머니는 대저택처럼 커지고 있다. 정원에는 수천 년을 통과한 나무들이 지하로 자라고 술통이 점점 부풀어 오른다. 내가 가보고 싶은 북쪽의 맑은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