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욱 - 세계의 끝

사무엘럽 2021. 5. 10.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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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손이 나를 사육한다. 두 발이 나를 길들인다. 나는 정확하게,

 보폭을 유지한다. 건너편의 건너편의 건너편을 향하여,

 붉은 등이 켜지면 외로운 자들만이 읽을 수 있는 한 권의 책이 되기 위해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여행이란,

 

 횡단보도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나의 왼발이 그의 오른발에 섞여들고 그녀의 표정에 그의 시선이 뒤섞이는 지금을,

 세계의 끝이라고 부르자. 신발의 종류와 헤어스타일, 그리고 교우관계에 이르러서야

 완성되는 세계. 나는 이윽고,

 

 남녀노소가 되었다. 그녀는 혼자 외우기 좋은 주문을 알게 되었고, 그는 개들의 침묵을 이해했으며, 나는 십년 전 어느날의 중얼거림을 똑같이 반복했다. 여기는 어제의 힘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곳. 신호등은 빨강 초록 주황 빨강, 

 외로운가?

 

 누군가는 휴대전화의 버튼을 거칠게 누르고 누군가는 갑자기 차도로 뛰쳐나갔지만 모두가 거리의 문장을 느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욕설에 익숙한 소년소녀들의 몫. 이런 개새끼가,

 

 이곳은 신호등이 지배하는 장소,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 자동차들은 세계의 끝을 향해 질주하고

 나는 험상궂은 표정으로 슬픔을 표현할 수 있다.

 그녀가 주문을 외우자 푸른 등이 켜졌다. 횡단보도는 건너편의 건너편의 건너편으로,

 

 이어졌다. 건너간다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횡단보도의 한가운데에 이르자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듯 모두들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몇구의 시신이 이곳에서 발생했다. 신호등이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그런 빛깔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