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욱 - 아르헨티나의 태양

사무엘럽 2021. 5. 9.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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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침마다

 지구 반대편을 기준으로

 깨어났다.

 

 당신이 탱고를 추는 오후는

 잠 속의 내가 리듬을 잃는 시간

 손끝이 천천히 지워지는 당신의 자정은

 내가 오늘의 사건사고란을 읽는 시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정오에는 그림자의 목이 사라지고

 그늘 속의 눈 코 입이 자정의 내 얼굴을 닮아가고

 우리는 서로 발바닥을 맞댄 채

 지구를 움직였다.

 

 오늘은 하루종일 내가 삼킨 혀끝에

 당신의 긴 식사시간을 더하도록 하자.

 갓 잠에서 깬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창문을 열면

 하루의 근무를 끝낸 당신이 밤하늘을 쳐다본다.

 

 거기는 별자리를 잃은 별들이 하나

 둘

 아홉

 지금은 그늘 속으로 사라진 나의 목을 달고

 당신이 깨어나는 시간

 

 태양이 지구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오늘도 정교하게

 그림자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는

 아르헨티나의 태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