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욱 - 밤의 연약한 재료들

사무엘럽 2021. 5. 9. 09:48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이장욱 시집, 문학과지성사 정오의 희망곡:이장욱 시집, 문학과지성사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이장욱 소설집, 문학과지성사 천국보다 낯선:이장욱 장편소설, 민음사 내 잠 속의 모래산:이장욱 시집, 민음사

 

 

 밤이란 일종의 중얼거림이겠지만

 의심이 없는

 성실한

 그런 중얼거림이겠지만

 

 밤은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지 않고

 맹세를 모르고

 유연하고 겸손하게 밤은

 모든 것을 부인하는 중

 

 죽은 사람의 과거가 빈방에서 깊어가고

 소년들은 캄캄한 글씨를 연습하느라 손가락만 자라고

 늙은 개의 이빨은 우우 짖을 때마다

 설탕처럼 녹아가는데

 

 신축건물들이 늘어서자

 몇 개의 골목이 중얼중얼 완성되고

 취한 남자는 검게 그을린 공기 속을 흘러가고

 밤은 그의 긴 골목이 되었다가

 그가 되었다가

 

 드디어 외로운 신호처럼

 보안등이 켜지자

 개의 이빨은 절제를 모르고

 

 갓 태어난 울음들이

 집요하고 가득한 밤을 향해

 오늘도 녹아가는 이빨을

 필사적으로 세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