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욱 - 혈연의 밤

사무엘럽 2021. 5. 6.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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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생각보다 조금 더 정확하게 태어났다.

 눈초리와 코의 각도에서

 피의 방향까지.

 

 시체처럼 잠든 뒤에는

 생년월일 이외의 모든 것을 기억해냈다.

 모래알이 사막을 상상하듯이

 칼이 도마 위의 고등어를 이해하듯이

 

 피는 가장 좁은 곳에서 빨라지고

 나는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팔이 되어 꿈틀거렸다.

 그곳에 내가 모르는 누가 있구나.

 어딘지 끌리는 예언이 있구나.

 격렬하게 침묵을 연습하는 아버지,

 어머니는 죽었다.

 

 아이들이 같은 방향으로 자라는 수많은 밤

 나는 지금 어떤 소년인가.

 맹세인가.

 나의 혈관 속을 걸어가는 그, 그녀, 그, 그녀들......

 같은 동작으로 밥을 먹고 같은 간격으로 화를 내고 같은 깊이로

 침울한

 

 나는 네 발로 기어가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이윽고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걸어갔다.

 잔인하고 아름다운

 정확한

 그런 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