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류근 - 엽신
사무엘럽
2020. 11. 8. 10:48
우산을 쓰고 극장 앞에서 걸음을 멈춥니다 언젠가 황금의 등불을 내다 건 은행나무 아래서 그해의 가을비와 마주친 적 있습니다 당신은 빗방울보다 깊고 달콤한 눈빛을 반짝이며 오래된 정물처럼 멈춰 서 있었지요 나는 겁먹은 소년처럼 도무지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말도 그 순간엔 빗소리보다 정직할 수 없을 거였습니다 다만 내 안에서 일제히 소리치는 금관악기들의 탄성을 들었을 뿐입니다 아, 다행이다 거기쯤 있어줘서 정말 다행이야
그날 내린 비가 그해의 첫 가을비였는지 마지막 가을비였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이 세상에 내리는 가을비를 다시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가을날은 그저 내 상실의 나날들을 지나쳐 갔고 모든 비는 내 어두운 창에 내리다 그쳤을 뿐입니다 기억나지 않는 것은 의미가 잘 생겨나주지 않는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문득 가을비가 옵니다 당신의 부재가 연못보다 환한데도 비가 옵니다 우산을 쓰고 극장 앞에서 나는 오래 서 있는 우체통처럼 옛일을 생각합니다 돌아오지 않는 눈빛들과 위안의 말들을 생각합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아직은 참 괜찮습니다 내 그리움에 귀 기울인 빗방울 하나 지금쯤 당신의 아득한 눈썹 위에 떨어질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