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행숙 - 구름과 벌판과 창고

사무엘럽 2021. 5. 4.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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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그르르 몸을 몇 바퀴 돌려보니 사방이 달의 표면처럼 휘어진 지평선입니다. 스커트 자락이 프로펠러처럼 펄럭이다가 멈췄구요, 하늘에는 동작구만 한 대단한 구름 덩어리가 떠 있었습니다. 대지와 하늘이 만나서 너그러움, 무거운 발걸음, 우울, 고집, 침착함, 숭고함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냈구요, 아무 말도 하지 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이것은 구름의 조언이며 부탁이며 겁박, 이것은 또한 구름의 지휘봉이며 플래카드며 흰색의 파시즘, 이 모든 것들의 뉘앙스가 관현악단의 합주처럼 하모니를 이루어 대기 중에 울려 퍼지고 있어요.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 서 있으니까 나는 고작 열세 살 여자아이입니다. 열세 살, 나는 세상에 다시 한번 던져져 다시 태어나야 했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피, 피, 피, 빨간 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은평구만 한 벌판에 허술하고 지붕이 낮은 가건물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습니다. 창고, 창고 같은 커다란 상자를 발견하면, 나는 더러운 창문에 눌어붙은 나방 같은 눈동자, 여덟 살의 나는 틈만 나면 어미 새처럼 물어 나르고 불꽃처럼 날름거리는 이야기의 쾌락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고, 이야기는 언제나 검은 아가리를 열어 어린아이들을 통째로 잡아먹었습니다. 우리는 즐거웠어요. 나는 거대한 암소의 내장에서 미끄덩 빠져나와 뒷마당에서 우엑, 우엑, 구역질을 했지만요, 다음 날 어스름이 깔리면 또다시 창고로 살금살금 기어들어 갔습니다. 날지도 못하는 닭들이 푸드덕푸드덕 소리를 내며, 무서운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이야기를 퍼뜨리고 있었구요, 피, 피, 피, 피, 검은 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동작구만 한 구름이 떠 있고, 회칠한 창고들이 띄엄띄엄 흩어져 있으며, 날벌레와 뱀과 고양이를 많이 가지고 있는 벌판은, 20년 후 최신식 국제공항 청사와 활주로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언젠가 제2여객터미널 탑승구 유리벽에 기대어 유년의 벌판 속으로 달려가는 당신, 어린 당신을 좇아가는 당신의 눈빛에 잠시 붙들리게 됩니다. 당신은 창고와 구름을 무슨 비밀상자나 마술상자처럼 뜯어보려고 해요. 그러나 당신이 진저리치지 않았나요? 이 땅의 모든 것과 굿바이, 굿바이, 오랫동안 당신은 당신과 작별인사를 나누지 않았나요? 출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10분 후 당신은 점점점점 속도를 올리며 황량한 4월의 벌판을 밤하늘의 천둥 번개처럼 가로지르게 됩니다. 이제 비행기가 이륙합니다. 제발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