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행숙 - 덜 빚어진 항아리

사무엘럽 2021. 5. 2.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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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너를 항아리 만드는 사람으로 키운 줄 알았더니, 너는 항아리 깨뜨리는 사람이 되었구나. 항아리를 빚는다는 것은 안과 밖을 만드는 일이다. 밖이 있어야 안이 생긴다. 안이 있어야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나의 항아리는 밖으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안으로 비밀을 보존한다. 이대로 영원히 멈췄으면, 기도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이 나의 항아리의 형식을 결정한다.

 

 항아리는 혼돈입니다. 안인 줄 알았더니 밖에 버려져 있더군요. 그래서 밖이구나, 했는데 안에 갇혀서 삼 일 밤낮을 울었단 말입니다. 잘 빚어진 항아리나 덜 빚어진 항아리나 깨지기 쉬운 건 똑같고, 깨지면 환상이 깨지듯 순식간에 항아리는 사라져버려요. 항아리를 만들어야 항아리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태어나야 죽을 수 있습니다. 가마에 불을 지피며 죽음을, 다가오는 죽음을 뜨겁게 묵상합니다. 선생님은 죽음의 꽃잎들 속에 있지 않습니까?

 

 나는 나의 항아리를 깨뜨리려고 너를 키웠구나. 너는 도끼를 들고 글을 쓰는 거냐? 손목은 도끼를 들어 올리려 하는데 도끼가 손목을 부러뜨리는구나. 어리석은 자여,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라면 무기가 너를 사용할 것이다. 말하라, 내가 누구냐? 내가 누군 줄 알아야 네가 누군지 알지 않겠느냐.

 

 선생님이 항아리를 만들면 나는 항아리를 깨겠습니다. 어떤 항아리에는 술이 익어가고, 어떤 항아리에는 시체가 구겨져 있어요. 어떤 항아리에서는 뱀이 기어 나오고, 어떤 항아리 속에는 총 한 자루가 끈적이는 침묵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항아리에 손을 넣는 것이 두렵습니다. 항아리에서 손을 빼는 것이 더 두렵습니다. 선생님의 손은 어디에 있습니까? 선생님은 선생님의 말을 이해 못 하고, 나는 나의 말을 이해 못 합니다. 어느덧 누가 누구의 말을 하는지, 누가 밖에 있고, 누가 안에 있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는 한 개의 항아리도 완성 못 하지 않았느냐. 한 번만 더 묻자. 너는 누구냐? 네가 누군 줄 안다면, 내가 누군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