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민 - 유리병

사무엘럽 2021. 4. 27. 22:29

 

에로틱한 찰리:여성민 시집, 문학동네 부드러움과 해변의 신:여성민 소설, 민음사

 

 

 학교에서 돌아온 언니가 유리병을 들고 들어온다 언니는 감자를 깎아 유리병에 넣는다 감자는 마당에 쌓이고 언니는 끊어지지 않게 잘도 깎아 껍질을 병 속에 담는다 유리병 안에 껍질이 쌓인다 예쁜 동생아 계단이라고 생각해 빈집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건 계단이야 음악을 들으며 언니는 즐겁게 감자를 깎는다 계단은 병 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사라지는 계단을 따라 유리병 속으로 들어간다 계단은 왜 밑으로 사라지는 걸까 계단이라는 중독 계단이 하나씩 사라져 집은 점점 빈집이 되고 나는 계단이 사라진 집에서 살금살금 건너뛰며 돌아다닌다 왈츠는 문틈으로 흘러나온다 감자를 깎는 언니는 칼에 손가락을 베인다 피가 나고 있어, 언니 걱정 마 그냥 피인 걸 감자 하나도 적시지 못하는 한 방울의 피 아이를 갖게 되면 네 몸에도 유리병이 생기지 붉은 병을 보여줄게 그리고 흰 병 계단은 자꾸 사라져 조금씩 집이 무너지는데 무너지는 집에서 언니는 감자를 깎는다 왈츠는 문틈으로 흘러나오고 나는 사라진 계단을 따라 지하실로 내려간다 지하실을 갖는다는 건 심벌즈 같은 거란다 동생아 여기서 내가 울면 거기서 네가 들을 수 있지 언니는 감자를 깎고 나는 한 벌의 심벌즈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성스러운 것은 언제나 계단 아래 있다 계단은 사라지고 계단은 생기고 나는 지하실로 지하실로 내려간다 집이 무너져 모든 것이 희미해진다 동생아 성스러움은 언제나 계단 아래 있지 언니는 자꾸 손을 베이고 유리병 안으로 피의 계단이 쌓인다 내가 유리병을 깬다 언니, 붉은 병을 보여줄게 다음엔 흰 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