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아 - 하얀 크림

사무엘럽 2020. 11. 17. 08:02

 

오트 쿠튀르:이지아 시집, 문학과지성사

 

 

 작년 내내 일을 하지 않았어.

 일상은 꾸준했지.

 나는 새벽까지 음악을 듣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찻잔을 버리고 찻잔을 다시 사기를 반복했어.

 

 9월에는 작업이 하나 들어오긴 했지만 그건 철없이 국화꽃차 사업을 시작했던 커플이 나를 잠시 웃게 했기 때문이었어. 그 커플은 마케팅을 계획하고 물건을 판매할 유통 업체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했어. 말린 꽃들을 잘 보관하고 리장에서 서울로 운반하면서 추억을 쌓은 건, 공항에 대한 비행기표 시간과 통신 장애, 맛있는 면과 말을 타던 들판을 나누었던 것 같아.

 

 찻잔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평범한 소비자처럼 보이는 것 같아.

 그냥 전시 얘기를 해버리고 말았어.

 나는 자동차 전시를 해.

 시즌마다, 미리 내년에 팔 자동차를, 독일 자동차나 미국 차를

 

 그때마다 내가 생각했던 콘셉트는 동양에서 장군이나 왕족 들이 탔던 말과 소와 하인과 마차 들에 대한 상상이었어.

 

 어쨌든 내가 국화꽃차 상품을 디자인해주기로 한 이유는 우습겠지만, 찻잔이 그리웠기 때문이었어. 꽤 옛날이었는데 정말 갖고 싶었던 찻잔이 있었어. 그건 토론토 기숙사에서 지낼 때, 아래층에 살던 흑인 여자애의 화장대에 있었어. 옥빛의 도자기 찻잔이었어. 동양적인 스타일이었지. 흑인 여자애는 그 찻잔에 사귀던 남자애들이 준 반지를 모으고 있었어. 하도 남자가 자주 바뀌어서

 

 계단에서 만날 때마다 이름이 뭐냐고 물었지.

 벤, 찰리, 해리, 브라이언...... 흑인 여자애는 가슴이 크고 허리가 잘록했어.

 흑인 여자애는 어느 날 일본 애를 데리고 온 거야.

 작곡을 하는 아이였는데, 둘이서 우동을 만들고 있더라.

 내 방까지 냄새가 진동했지.

 

 여느 때처럼 계단에 내려가다가 만난 흑인 여자애는 그날따라 오버하며 내 얼굴에 뺨을 부비며 반가워했지. 나는 속으로 왜 또 지랄이야, 생각하며 굿, 럭키를 외쳐주었지. 일본 남자애는 덜컥 내 허리를 감더니, 우동을 좋아하냐고 물었어.

 

 나는 정말이지 같이 들어가고 싶지 않았어. 

 어쩌다가 그 순간 평범한 섹스와 당연한 가구들이 탄력과 환상을 얻었다고나 할까.

 

 둘의 사랑보다는 셋의 어긋남, 세 가지 주장, 한 가지 악다구니, 통속적인 것들은 고귀해졌지.

 하지만 한국에 돌아가야 할 걸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어.

 몇 달밖에 남지 않았다고, 어서 돌아오라는 그 목소리가

 박쥐처럼 내 귀를 뜯었어.

 나는 위로를 모르는 인간이거든. 그런데 말이지.

 위로라는 그 천박한 길목에서 나는 무슨 버스를 타고 떠나버려야 하나, 

 그 핑계들을 생각하고 있었지.

 

 우리는 거실에서 와인을 땄어. 흑인 여자애는 갑자기 내 앞에서 일본 남자애의 옷을 벗기더라. 나는 고개를 돌렸어. 그리고 옷 방으로 들어갔어. 우동 국물이 끓고 있었어. 흑인 여자애는 신음을 냈지. 그 여자애는 명랑하고 흥이 많은 친구였어. 나는 옷 방에서 하얀 원피스 하나를 찾았어. 가슴이 큰 흑인 여자애는 한 번도 입지 못했는지 tag가 그대로 붙어 있더라.

 

 또 한국이 떠올랐어. 한국에서 나를 보내버릴 때,

 혈압약을 먹던 그 늙은이의 입가에 개구리 거품처럼 계속 품어져 나오던 하얀 침들이. 그 하얀 침들이 나는 소름 끼쳤어.

 

 그리고 밖이 나를 불렀어. 클로이, 클로이

 Wanna eat udon together?

 나는 예스, 예스, 잠시만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흑인 여자애 찻잔에 있던 수십 개의 반지를 모두 가져왔어.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지. 가방에 모두 넣고 집으로 올라갔어. 그리고 벌벌 떨며 내 손가락에 하나씩 껴보았지. 하나도 맞는 게 없더라. 눈물이 났어. 신경질도 났지.

 

 창밖이 또 나를 불렀지.

 클로이, 클로이

 

 나는 일어나 밖을 보았지.

 이런 퍽, 이런 퍽 유

 달콤하게 어정대며

 

 흑인 여자애와 일본 남자애는 보드를 타고 있더라. 자유롭게. 순간 자유롭다는 건 비아냥거리는 건가 생각했어. 수영장 주변을 뱅글뱅글 돌면서, 묘기를 부렸지. 둘은 음악을 크게 틀었지. 랩이었다가 펑크였다가 재즈였다가 휘파람을 불면서 나에게 내려오라고 손짓했지. 아임 오케이, 댓츠 오케이, 노 땡큐, 난 됐어, 난 됐어. 내가 웃었는지 찡그렸는지 떨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

 

 그러다가 흑인 여자애의 까마득한 옛날 애인이

 온몸에 문신을 한 그 남미 남자애가 오토바이에서 내려, 갑자기 뛰어와 흑인 여자애를 칼로 찔렀어. 수십 번 쑤셔댔지. 나는 위층에 있었고 하늘을 보았지. 푹신한 구름 하나를 보았어. 야. 야.

 

 야, 야, 그냥 야, 야, 그래도 한 번만, 야, 나를 한국말로 부르던 야라는 호칭. 제발, 도와줘요. 여기 도와줘요. 아무 비명도 나오지 않았어. 사건이 잊히고, 절정도 없이. 4년이 지난 후 나는 졸업했고, 퍼레이드 시즌을 계획하는 디자이너가 되었어. 전시가 끝나도 쉴 수 없었고, 한국에도 가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