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이기리 - 코러스
사무엘럽
2021. 4. 13. 23:20
너는 점심시간만 되면 식당에 가는 대신
빈 교실에 남아 도시락을 먹었고 나처럼
매일같이 도서관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갔다
그리고 너는 내가 걸어 둔 외투에
항상 자신의 외투를 겹쳐 걸어 두었다
책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너는 엽서만 한 수첩에 무엇인가를 적고 있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들이
책장을 넘기는 사이사이에 눈송이처럼 떨어져 녹아내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읽던 책을 잠시 시옷자로 덮어 두고
옷을 챙기고 나가 운동장 주변을 좀 걷다 들어올까 싶다가도
나의 외투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너의 외투를 바라보고 나면
그 자리에서 책을 단숨에 다 읽었다
전화를 받으려고 황급히 나가는 네 뒷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두고 간 수첩을 집어 들었다가
가만히 내려놓았다
수선스러웠던 복도에 찾아온 고요 속에서 너는
차가운 벽에 기대 앉아 두 무릎을 감싸고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동안 눈발은 점점 거세졌고
마음이 무거워지면 발소리도 따라 낮게 들렸다
나의 외투가 외롭게 걸려 있는 날이 많아질수록
겨울방학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감고 있던 파란 목도리를 벗어
네가 늘 앉던 자리에 올려 두었다
모르는 목소리를 따뜻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주머니에
쪽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