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김유림 - 에버랜드 일기
사무엘럽
2021. 4. 12. 18:45
귀뚜라미가 청소 도구실에서 울고 있다
짧고 강렬하게
어둡고 서늘한 공간을 향해 그림자를 드리우며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한 인간이 오늘의 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건 나도 나에게 있어 마찬가지)
울고 있는 귀뚜라미는
사물의 배열을 조금도 바꾸지 않고
흥미를 끈다
짧은 머리를 매만지고
구겨진 옷깃을 잡아당긴다
젖은 손을 허공에 가볍게 털며
그 이상 어둡고 서늘한 구역을 향해 들어가지 않는다
물을 내리고 소지품을 챙겨 사람이 나가고 나는 귀뚜라미를
지켜보는 보호자가 되어
평소의 나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림도 꿈도 없다 (그림자는 있다)
이런 상태에선
조금만 나를 끌어당기면 내가 따라온다
아주 당겨도 내가 오지 않는 경우는
죽거나 사랑하는 꿈을 꿀 때밖에 없다
특히 사랑한다고 믿는 꿈에서
나는 원하는 공간으로 수십 번씩 순간이동하고 원하는 만큼 사랑한다
나는 나를 따라가서 그렇게 하는 나를 지켜봐야만 합니다
지금은 실내에서 우는 가을의 곤충이 생소해서 그러는 것뿐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네 하고 돌아서면 10초가 흘렀고
내가 말하는 조금이란 정말 조금이다
영원 같지만
감쪽같지
내가 아니었던 적이 없는 거
당신에게서 가방을 돌려받고 고마워 인사한다
우리는 오늘 놀러 나와서 가방이 무지 가볍다
하루가 달라지는 게 이렇게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