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난다, 내가 가장 투명해졌을 때
슬픔 속으로 난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들어왔을 때
이곳에선 모든 게 절반뿐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빨간 새, 삐걱거리는 벤치, 앙다문 입술 같은 구름들......
누군가 그리다 만 그림 속 같다
줄기와 잎사귀는 선명하지만 어디에도 꽃은 없다
꽃 없는 꽃도 꽃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질문에 휘감기는 사이 한 소녀가 다가와 쪽지를 건넨다
"이곳에 나를 묻어줘"
목은 선명하지만 얼굴이 없어서
나는 자꾸만 소녀의 얼굴을 상상하게 되고
꽃은 꽃으로만 피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머지 세계를 그려보기로 한다
벤치의 절반은 돛단배
구름의 절반은 파도
그러면 벤치를 하늘에 띄울 수 있다
하늘의 절반은 이미 바다가 되어 있다
이제 소녀를 태울 차례
꽃의 절반은 새에게
새의 절반은 꽃에게
스미게 하고
피어오른 새와 날아가는 꽃 사이에서
소녀가 적어준 주소지를 펼쳐본다
"얼굴 없인 아무 곳으로도 갈 수 없어요"
벼락같은 소녀의 말은 비가 되어 내리고 내리고
하나가 없으면 실은 전부 없는 것이라는 듯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려놓았다
붉은 새가 새의 끝까지 날아간다면
가장 붉은 새가 될까 붉음을 벗을까
나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
앉을 수도 설 수도 없는 마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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